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5년 만에 종말을 맞았다. 파리뿐만 아니라 전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1911년의 모나리자 도난 사건 때문이었다. 한 이탈리아인 남자가 대낮에 루브르박물관 전시실에서 유유히 모나리자를 떼어 들고 사라졌다. 아폴리네르는 다만 이탈리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건 용의자로 몰려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둘은 헤어졌다. 헤어진 해인 1912년 로랑생은 첫 개인전을 열었고 아폴리네르는 시집 ‘알코올’에 실연의 아픔을 담은 시 ‘미라보 다리’를 발표했다.
몽마르트르 아틀리에 ‘세탁선’에 피카소·로랑생 흔적 남아
몽마르트르에 가면 피카소와 로랑생, 아폴리네르가 드나든 아틀리에 ‘세탁선’이 남아 있다. 그들 외에도 브랑쿠시, 모딜리아니, 막스 자코브 등이 이 아틀리에에 죽치고 있었다고 한다. 2층인 세탁선 건물은 작은 방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서 화가들의 집합 아틀리에로는 최고의 구조였다. 세탁선의 주인 격이었던 피카소는 여기서 유명한 ‘아비뇽의 여인들’을 그렸다.
그러나 이 빛나는 창작의 산실은 더 이상 관광객에게 문을 열지 않는다. 이곳의 내부는 1970년 일어난 화재로 모두 불타버렸다. 화가들이 좋아했던 미로 같은 내부에 막상 불이 붙으니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었다. 다행히 여기서 그려진 대부분의 그림들은 인근의 몽마르트르 미술관으로 옮겨진 뒤였다.
세탁선의 쇼윈도에는 젊은 피카소와 모딜리아니의 흑백사진과 연필로 그려진 로랑생의 자화상이 전시돼 있다. 언제나 술에 취해서 몽마르트르의 카페에 나타났다는 모딜리아니,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담긴 그의 옆얼굴이 우수에 젖어 있다. 젊은 날의 피카소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미남이다.
로랑생의 연필 자화상에는 그녀의 서명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까만 눈동자의 그녀는 꿈꾸는 듯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아폴리네르와 헤어진 그녀는 독일 남자와 결혼한 탓에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프랑스에서 쫓겨나다시피 하는 기구한 삶을 살다 1956년 사망했다.
세탁선의 놋쇠 손잡이를 가만히 잡아본다. 피카소와 모디(모딜리아니의 별명)와 로랑생, 그리고 브랑쿠시와 아폴리네르가 젊은 꿈을 묻었던 이 공간. 이 문을 열고 안으로 성큼 들어설 수만 있다면….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고 햇살만이 세탁선의 초록 문을 비췄다.
모네’는 무엇에 빠졌었나
화가들 숨결 넘실대는 파리 … 미라보 다리엔 시인의 사랑 숨어 있어
▷ ‘해돋이-인상’이 소장된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끝)
세탁선(le Bateau-Lavoir)
주소 13 Place Emile-Goudeau 75018 Paris Globe Walk, London SE1 9DT
지하철 Abessess, Pigalle
비공개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Musee Marmottan Monet)
주소 2, rue Louis Boilly 75016 Paris
전화 +33 1 44 96 50 33
팩스 +33 1 40 50 65 84
홈페이지 www.marmottan.com
지하철 라 무에트(la Muette)
7. 마르모탕 미술관과 오랑쥬리 미술관 (8월 24일 목요일 오후)
베르사유를 나와 RER을 타고 Boulainvilliers역에 내렸다. 늘 느끼는 거지만 내리기만 하면 유명한 미술관이라 안내표지판이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없을 때가 많다.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잘 모른다. 그래서 지도를 출력해와야 하는데 분명 쉬워보여서 그냥 왔더니 아뿔사 도무지 모르겠다. 결국 지적으로 보이는 할머니(젊은 처녀, 총각 다 필요없다. 파리에 사는 지적으로 보이는 할머니를 잡아야 영어가 된다.)를 붙잡고 물어보니 정확히 가르쳐 주셔서 10분정도 걸어 도착했다. 나중에 보니 La Muette역에서 내리면 표지판도 있고 큰 공원을 지나면 바로 보였다.
마르모탕은 주택가 초입에 자리한 인상주의 전문 미술관이다. 모네의 그림이 많다는 안내서의 말만 믿고 갔는데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대표작이라 할만한 좋은 작품들이 아니었다. 정말 대충~~보고 나왔다. 모네의 흔적은 뭐라도 보고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추천하지 않는다.
예약한 식당인 레 부키니스트의 라스트 오더가 1시반이라 택시를 탓더니 15분만에 도착했다. 11유로가 나와 팁으로 1유로를 더 주고 내렸다. 편히 빠르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걸 알고 오후에 여러번 택시를 탔는데 시내에서는 거의 10유로 정도면 여러번 갈아 타야할 곳을 편히 갈 수 있었다. 레 부키니스트(Les Bookinistes)는 미슐랭 목록에도 있고 여행서에도 있는 곳이다. 점심은 30유로 정도 하고, 노트르담 성당에서도 가깝고, 음식도 괜찮다. 버스 24번을 타고 오르세 방향으로 가다보면 세느강변에 접한 레 부키니스트의 녹색차양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전날 미슐랭 별을 받은 식당에서 먹었더니 영 기대에 미흡했다. 순서가 바뀌었다면 맛있게 먹었을텐데. 아쉬웠다.
나는 작년에 노트르담 성당에 다녀왔기 때문에 생트 샤펠에 가기로 하고 얘들은 노트르담에 갔다. 생트 샤펠은 법원 안에 있는데 소지품 검사를 해야 입장이 가능하다. 10분 정도 줄을 서서 기다리다 소지품 검사를 끝내고 들어가니 멋진 외관의 생트샤펠이 보인다. 내부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매우 아름답다고 하는데 내 보기엔 촌스러웠다. 역시 노트르담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더 아름답다.
생트 샤펠을 관람한 후 38번 버스를 타고 퐁피두 센터로 갔다. 퐁피두에는 내가 좋아하는 니키 드 생팔의 조각분수가 있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 곳이다. 순진한 림이는 배관이 노출된 퐁피두가 공사중이라 했더니 믿었다. 음하하!!! 잠시 웃었다. 퐁피두 앞 마당에는 브랑쿠시의 아틀리에가 있다. 촘촘하게 그의 작품이 들어서 있는데 좋은 작품이 많고 그의 숨결이 느껴져서 좋았다.
바쁜 걸음을 옮겨 피카소를 향하니 중간에 마르세가 있어 그동안 잘 먹지 못한 과일을 샀다. 과일값은 우리보다 약간 싼 듯했다. 피카소 미술관을 보고 택시로 팡데옹에 가니 8유로였다. 아마 10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시간이 바빠 아래층 묘실은 입구만 보고 환한 돔 위를 올려다보았다. 참 멋진 건축물이다. 팡데옹 옆에 쌩 떼띠엔 뒤 몽 성당이 있다. 관람객이 많지 않아 조용하고 운치가 있는 곳이다.
참 바빴다. 갈 곳은 많은데 시간은 없고 또 택시를 타고 콩코르드 광장에 갔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서인지 조금 밀려서 조바심을 냈는데 많이 늦지 않았고, 너무 가고 싶었던 오랑쥬리 미술관에 도착했다. 20세기 초반의 많은 작품이 있었고, 로랑생의 그림이 기억에 남지만, 너무 좋은 것은 모네의 수련 연작이다. 꼭 루브르에 가는 분들은 걸어내려와 오랑쥬리에 들리기 바란다.
보시라!!!
바쁜 걸음을 옮겨 이제 투르로 가는 기차를 탈 예정입니다.
빛이 존재했기에 모네도 존재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네의 작품들은 빛을 통해 완성되었다. 이 세상에 그 빛이 발하기 전, 이미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에게는 수많은 작품을 남겨주었다. 따뜻한 감성과 독특한 기법으로 ‘예술과 문화’의 본보기가 되어주는 끌로드 모네(Claude Monet). 그가 남긴 작품들은 지금 전 세계 미술관에 흩어져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있지만, 그중 파리에 있는 이 세 곳의 미술관이야말로 모네의 작품을 제대로 만나볼 수 있다. 풍요로움과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모네의 그림을 찾아 두근대는 가을여행을 떠나본다. 작은 공간에서 만나는 아기자기한 재미 파리 시내의 미술관을 구석구석 다녀봤다면 이제는 조용한 곳에서 감상할 차례. 모네의 작품과도 잘 어울리는 풍경을 가진 마르모탕 미술관에서라면 그것이 가능하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역인 라 무에투 역으로 찾아가본다. 미술관까지 들어가는 길은 남이섬의 길목처럼 기다란 가로수와 잔디를 가진 볼로뉴 숲이 펼쳐진다. 화려한 파리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은은한 자연과의 만남이 사뭇 즐거워진다.
교통 지하철 9호선 La Muette역에서 하차
개관 오전 10시~오후 5시 30분
휴관 월요일, 5월 1일, 12월 25일
요금 6.50유로(25세 이하는 4.5유로)
문의 (33 ) 01 44 96 50 33, www.marmottan.com
[모네의 그림] - 마르모탕 미술관
by Yang Hyo Sun photo by Maison de la France
마르모탕 미술관
마르모탕 미술관은 모네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사실상 모네의 개인 미술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오르세 미술관이나 오랑주리 미술관보다 크지도 유명하지도 않지만,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풍경들과 모네의 작품들이 가득해 이곳을 돌아보는 동안 마냥 미소를 머금게 해준다. 투박한 외관과는 달리 미술관 내부는 세련된 인테리어와 소품들로 눈길을 끈다.
1층에 전시된 모네의 유품 전시실을 뒤로 한 채, 복도를 지나 어두운 홀에 들어선다. 이 복도 끝에서 다시 한 번 모네의 관련 사진과 그가 사용했던 화구들을 보고, 둥글어진 계단을 이용해 아래로 내려가본다. 계단을 내려서자 처음 맞이하는 작품은 ‘해돋이’다. 붉게 물든 해가 가장 인상적인 ‘해돋이’는 프랑스 국보급 작품으로 ‘인상파’라는 말이 생기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처음 볼 때는 바다 위에 해 하나가 있는 듯 싶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해 주변으로 붉게 물든 하늘과 물 위로 넓게 퍼져가는 붉은 빛의 조화가 자연스레 이어져 감동을 자아낸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돌리면 ‘생 라자르 역’ 연작 8점 중 2점, ‘런던 국회의사당’, ‘루앙 성당 연작 ’, ‘지베르니 정원’들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수련’은 지베르니의 연못과 그 위에 핀 연꽃을 그린 작품으로,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보았던 연작과는 다른 소박함이 있어 오래도록 그곳에 머물게 한다. 이외에도 2층으로 올라가면 르누아르, 고갱, 모리스 등의 작품이 있다. 생기 넘치는 붓 터치, 강렬한 색채들의 조화, 모네의 작품을 감상하고 싶다면 주저 없이 이곳을 추천하겠다.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이 그저 작품만을 감상하는 벅찬 감동의 시간을 만들어줄 테니.
들라크루아 [1798.4.26~1863.8.13]
프랑스의 화가.
원어명 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프랑스 샤랑트현(縣) 생 모리스
주요작품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알제의 여인들》(1834)
1798년 4월 26일 샤랑트현(縣) 생 모리스에서 출생하였다. 명문가 외교관의 아들로 명석하며 정열적인 상상력을 타고났다. 16세에 고전파 화가인 P.N.게랭에게 그림을 배웠고, 1816년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루브르미술관에 다니면서 P.P.루벤스, P.베로네세 등의 그림을 모사하였고, T.제리코의 작품에 매료되어 현실묘사에도 노력하였다. 1819년 제리코가 발표한 《메두사호(號)의 뗏목 Raft of the Meduse》은 그에게 낭만주의를 수립하는 결정적인 감격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1822년 최초의 낭만주의 회화인 《단테의 작은 배》를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극적인 표현은 다비드풍(風)의 고전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하여 1824년에는 그리스의 독립전쟁에서 취재한 《키오스섬의 학살》을 발표하여 '회화의 학살'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힘찬 율동과 격정적 표현은 그의 낭만주의를 더욱 확립시켰다. 더욱이 이때 살롱의 똑같은 방안에 진열된 영국의 J.컨스터블의 풍경화의 밝은 색조에서 자극을 받고, 자기의 작품을 밝게 새로 칠하여 한층 더 강렬한 효과를 나타냈다.
다음 해 런던에서 R.P.보닝턴, J.P.로런스 등과 사귀는 동안 더욱더 빛깔의 명도와 심도를 증가시켰다. 즉, 자신과 낭만주의 회화의 성숙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 후 수년간의 작품 중에서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은 대작이다. 그 후에도 계속 진전하여 1832년 모르네 백작을 수반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수행한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근동 지방의 강한 색채와 풍속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는 동시에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에서의 동방취미 풍속화의 기반을 닦았다. 명작 《알제의 여인들》(1834)은 이 여행에서 얻은 훌륭한 성과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를 중심으로, 초기에 볼 수 있었던 외면적인 격렬한 맛이 점차 내면화되었다.
작품으로는 이상에서 말한 대표작 이외에 초상화, 성서에서 제재를 택한 것, 말이나 사자 등의 동물을 그린 것도 많다. 더욱이 문학적·음악적인 정서도 풍부하여 셰익스피어, 바이런, 괴테 등의 작품을 일찍부터 가까이하였고, 음악가 F.리스트와 당시의 여성문학가이던 G.상드와도 친하였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재능과 환경은, 그에게 회화작품 외에도 오늘날 미술사상(美術史上) 귀중한 문헌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뛰어난 예술론이나 일기 등을 집필하게 하였다.
그의 예술형성에 전술(前述)한 화가 이외에도 16세기 베네치아파 화가인 미켈란젤로나 고야도 영향을 주었으며, 한편으로 그 자신의 영향은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를 물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E.드가와 A.르누아르에게 직접 연결되는 점도 많다. 후반기에는 교회와 파리의 공공건축물을 위한 대벽화 장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회 하원의 《국왕의 방》(1833), 국회 하원도서관(1844), 국회 상원도서관(1845∼1847), 파리시청의 《평화의 방》(1849∼1853, 소실), 루브르궁전의 《아폴로의 방》(1849) 등을 잇달아 그렸고 만년에는 동판화와 석판화 제작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흑백의 대조가 강조되고 한층 더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기교로써 《파우스트 석판화집》(1827) 《햄릿 석판화집》(1843) 등의 걸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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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첨부합니다... 순서는 들라크루아 그리고 그의 주요작품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알제의 여인들》(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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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 ( Delacroix, Ferdinand Victor : 1798.4.26 ~ 1863.8.13 )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 The Entry of the Crusaders into Constantinople
410 * 498 cm / Oil on Canvas
1840년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 Dante's Boat
189 x 242 cm / Oil on Canvas
1822년
사르다나팔의 죽음 / Death of Sardanapalo
392 x 496 cm / Oil on Canvas
1827-1828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Freedom Guiding the People
260 x 325 cm / Oil on Canvas
1830년
프랑스의 화가. 샤랑트현(縣) 생 모리스 출생. 명문가 외교관의 아들로 명석하며 정열적인 상상력을 타고났다. 16세에 고전파 화가인 P.N.게랭에게 그림을 배웠고, 1816년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루브르미술관에 다니면서 P.P.루벤스, P.베로네제 등의 그림을 모사하였고, T.제리코의 작품에 매료되어 현실묘사에도 노력하였다. 1819년 제리코가 발표한 [메두사호(號)의 뗏목:Raft of the Meduse]은 그에게 낭만주의를 수립하는 결정적인 감격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1822년 최초의 낭만주의 회화인 [단테의 작은 배]를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극적인 표현은 다비드풍(風)의 고전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하여 1824년에는 그리스의 독립전쟁에서 취재한 [키오스섬의 학살]을 발표하여 ‘회화의 학살’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힘찬 율동과 격정적 표현은 그의 낭만주의를 더욱 확립시켰다. 더욱이 이때 살롱의 똑같은 방안에 진열된 영국의 J.콘스터블의 풍경화의 밝은 색조에서 자극을 받고, 자기의 작품을 밝게 새로 칠하여 한층 더 강렬한 효과를 나타냈다. 다음해 런던에서 R.P.보닝턴, J.P.로런스 등과 사귀는 동안 더욱더 빛깔의 명도와 심도를 증가시켰다. 즉, 자신과 낭만주의 회화의 성숙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 후 수년 간의 작품 중에서 [사르다나파르의 죽음](1827)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1)은 대작이다.
그 후에도 계속 진전하여 1832년 모르네 백작을 수반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수행한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근동 지방의 강한 색채와 풍속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는 동시에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에서의 동방취미 풍속화의 기반을 닦았다. 명작 [알제의 여인들] (1834)은 이 여행에서 얻은 훌륭한 성과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를 중심으로, 초기에 볼 수 있었던 외면적인 격렬한 맛이 점차 내면화되었다.
작품으로는 이상에서 말한 대표작 이외에 초상화, 성서에서 제재를 택한 것, 말이나 사자 등의 동물을 그린 것도 많다. 더욱이 문학적·음악적인 정서도 풍부하여 셰익스피어, 바이런, 괴테 등의 작품을 일찍부터 가까이하였고, 음악가 F.리스트와 당시의 여성문학가이던 G.상드와도 친하였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재능과 환경은, 그에게 회화작품 외에도 오늘날 미술사상(美術史上) 귀중한 문헌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뛰어난 예술론이나 일기 등을 집필하게 하였다. 그의 예술형성에 전술(前述)한 화가 이외에도 16세기 베네치아파 화가인 미켈란젤로나 고야도 영향을 주었으며, 한편으로 그 자신의 영향은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를 물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E.드가와 A.르누아르에게 직접 연결되는 점도 많다.
후반기에는 교회와 파리의 공공건축물을 위한 대벽화 장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회 하원의 [국왕의 방](1833), 국회 하원도서관(1844), 국회 상원도서관(1845∼1847), 파리시청의 [평화의 방](1849∼1853, 소실), 루브르궁전의 [아폴로의 방](1849) 등을 잇달아 그렸고 만년에는 동판화와 석판화 제작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흑백의 대조가 강조되고 한층 더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기교로써 [파우스트 석판화집](1827) [햄릿 석판화집](1843) 등의 걸작을 남겼다.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거장 "들라크루아"
한성희 - 미술사가
19세기 서양미술사에서 들라크루아만큼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는 화가도 드물 것이다. 그가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주제면과 양식적인 면에서 본다면 다음과 같다.
먼저 주제면에서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1822년 살롱전에서 성공을 거두고, 1823년 제리코가 사망하면서부터 프랑스 낭만주의의 새로운 거장이 되는 들라크루아는 문학·음악·종교 등에서 주제를 취하면서 이후 10년 동안 <키오스 대학살>(1824), <미솔롱기의 폐허 위에 서있는 그리스도>(1826),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6),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등 격렬한 성격의 작품들을 주로 제작했다. 이러한 그의 낭만주의적 주제는 모로·퓌비 드 샤반느에 이어 르동의 상징주의로 이어져 근대미술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또 양식적인 면을 살펴보면 1832년 모로코 여행 이후 그는 이전의 작품들에 보이는 전통적인 기법, 즉 명암의 대비와 화면을 매끄럽게 하기 위한 유약의 덧칠 등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창적 기법을 선보인다. 색채를 분할하고 붓질을 거침없이 함으로써 화면에 거칠고 표현적인 특성을 남기는데, 이로 인해 색채가 회화의 구조 속에 들어가게 되고 붓 터치가 하나의 독립적 모티프가 되는 것이다.
“나는 순수한 고전주의자”
<알제리의 여인들>(1834), <유대인 결혼식>(1837~41), <탕헤르의 광신도들>(1838) 등의 작품에서 이러한 특징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양식적 특징은 선이 아닌 색채에 기초를 두는 쿠르베나 바르비종파, 그리고 인상주의라는 19세기 미술사의 또 다른 중대한 흐름으로 이어진다.
1863년 들라크루아는 사망 당시 6천여 점의 작품들을 남겼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가 남긴 수채화· 데생·밑그림들을 통해 엄청난 작업량과 다양한 모티프, 관심 주제에 대한 악착스러운 몰두 등을 확인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는 <낭만주의의 윤곽>이라는 제목으로 들라크루아가 제작했던 2백50여 점의 데생·판화·사진 및 괴테의 《파우스트》 일러스트레이션 작품 등 여러 작품들의 스케치들이 전시되어 들라크루아의 작품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작품들 옆에는 일기 및 최근에 입수된 모로코 여행기 원고 수사본 등도 함께 전시되어 그의 예술에 대한 생각을 살펴볼 수 있다.
들라크루아는 하나의 고정된 화파 안에 집어넣기에는 너무 포괄적인 작가다. 물론 그의 작품 주제가 상당 부분 단테· 세익스피어· 괴테· 바이런 등의 작품에서 나왔고, 그리스 독립전쟁을 표현한다거나 작품에 보이는 오리엔탈리즘과 이국적인 정취 등으로 그를 프랑스 낭만주의의 움직임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의 회화적 특질은 단순한 낭만주의를 넘어선다. 작품 세계가 장식적이며 바로크적인 성격을 지니는 동시에 고전주의의 단순성과 웅대함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대 미술의 규범과 그것이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변화된 모습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는데, 그런 연유로 다비드의 신고전주의를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단테·바이런·세익스피어…
“다비드 학파는 고대 미술의 모방에 기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습게도 자칭 뛰어난 고전주의적 학파라 한다. 더 정확히 말해 지적인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편협한 모방이 바로 다비드 학파를 고전주의라 말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다. 고대 미술의 정신에 스며들어 있는 연구 성과를 자연에 연결시키지 못하고, 단지 고대 미술에 대한 환상을 지녔던 시기를 반영할 뿐이다.”
(1857년 1월 13일 일기 중에서)
동시에 고전주의에 대해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는데, 고전주의란 어떤 감정이나 사물에 대해 정확하고 웅대하게 표현한 그림만이 아니라 단순성과 감수성을 키워주는 특성으로써 정신을 충족시키는 모든 조화로운 작품을 일컫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신화 및 알레고리 같은 고전적 주제는 빼놓을 수 없는 영감의 원천이었으며, 이를 새로운 방법을 통해 소화해 냈다.
1827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을 보면, 그가 낭만주의 정신과 고전적 주제 사이의 종합을 시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특징은 1834년 이후 제작된 벽화와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1849~59), <천재의 승리>(1849~51) 등 이번 그랑팔레의 <후기의 들라크루아전>에 나온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루앙 미술관은 <새로운 낭만주의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1820년대와 40년대 사이에 제작된 데생·수채화·판화 등 2백여 점의 작품들을 전시한다. 이 전시는 들라크루아의 동방 취향· 문학·영웅 같은 전형적 테마의 낭만주의 작품이 중심이다. 그리고 제리코와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들라크루아가 어떻게 제리코의 테마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두 작가의 작품을 함께 전시함으로써 보여주고 있다.
제리코의 작품 세계, 특히 그의 기념비적이며 미켈란젤로식의 작풍은 들라크루아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초기부터 1850년대까지 이어진다. 예를 들어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역시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1823~35)의 영향을 받았던 작품인데, 특히 왼쪽에 보이는 죄인의 모습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으로 그는 보들레르로부터 ‘문학적인 작가’라는 평을 받게 된다. 이러한 문학 작품에 영향받은 초기 작품들, 예를 들어 세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햄릿과 호라티우스>(1844), 월터 스콧의 작품에 기초한 <리에주 주교의 암살>(1831) 등이 이번 루앙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항상 끊임없이 새로운 주제를 추구했던 그는 죽을 때까지 문학에서 영감을 이끌어 냈다. 들라크루아의 흥미를 가장 많이 끌었던 작가로는 단테 이외에도 바이런·괴테·세익스피어·월터 스콧 등이 있었다. 그는 일기에 그림이 될 수 있는 작품에서 따온 문구를 적어 놓았는데, 각각의 작가들의 극적인 잠재성을 비교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가장 회화에 적합한 시인이 가장 위대한 시인은 아니다. 가장 적합한 작가들은 가장 묘사적인 작가들이다. 예를 들어 아리오스토는 그의 주제를 회화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 세익스피어나 바이런보다는 자극적이지 못하다. 이는 두 영국 작가들이 좀더 과장되기 때문이다.”
(1846년 9월 17일 일기 중에서)
만년에 그는 이미 다루었던 주제를 다시 다룸으로써 불필요하게 반복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1859년 살롱전에서 심사위원들은 그가 수도 없이 다루었던 <햄릿과 호라티우스>를 비난했을 정도다. 그렇지만 이 전시에 출품된 작품은 죽음의 순간에 팽배되어 있는 날카로운 고통을 좀더 자유로운 솜씨로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들라크루아는 비극적 요소와 격렬함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키기에 적당한 새로운 테마를 찾았다. 예를 들면 월터 스콧의 <아이반호>에 근거한 <강탈당하는 레베카>(1858)가 있는데, 이 작품 역시 당시 <햄릿과 호라티우스>와 마찬가지로 혹평을 불러일으켰다.
후기의 들라크루아와 종교화
“난동 속에서 인물들은 사지를 잃어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지를 다시 우연히 찾아서 바로잡는다. 레베카는 기괴하게 생긴 나뭇가지에 달린 옷처럼 강탈자의 팔에 안겨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 같은 평은 그랑팔레에서 열리고 있는 <후기의 들라크루아전> 카탈로그에 실려 있다. 이 전시의 목적 중 하나는 바로 이 시기 작품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재고해 보자는 것이다. 그랑팔레에는 1850년에서 63년에 이르는 1백20여 점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만년의 들라크루아전 작품 중 문학에서 주제를 취한 것 이외에 종교화도 전시되어 있다. 생 술피스 성당의 작품 <야곱과 천사의 싸움>(1849~64)을 제외하고 들라크루아의 종교화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사실 그의 초기 종교화 작품들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디드로의 무신론·볼테르의 반교권주의· 루소의 검신론에 빠져 있던 들라크루아는 오랫동안 불가지론을 주장했다. 1850년 이후 나이가 들면서 그의 이러한 불가지론은 형이상학적 고뇌로 대치되고 있다. 1862년 10월 12일자 일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우리가 잘했을 때 기쁘게 해주는 것도 이 내부의 현존이다. 천재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또한 그들의 순수한 생산물을 보고 자극시키는 것도 물론 그다.”
이 정신적 추구는 신약성서의 유명한 장면들을 휴머니스트 합리주의자의 시각으로 끊임없이 다루기 시작한 계기가 된다. 우선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통·고뇌에 밀착, 그리스도의 육체 위에 쏟아지는 수많은 비탄의 장면을 고뇌·슬픔·혼란으로 표현하고 있다. <갈릴리 호수 위의 그리스도>(1854)는 광포한 자연 앞의 인간에 관한 극적 주제를 바다의 정경과 연결시키고자 했는데, 이 종교화의 풍경 장면은 성서 개념에 충실한 완벽한 상상화인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상상력을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다.
“진짜 화가는 자연을 잘 아는 사람”
들라크루아는 단 한번도 살롱전에 순수한 풍경화를 출품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후기에 자연을 소재로 그린 작품들은 역사화 작품들보다 훨씬 더 미학적 감수성을 보여준다. 1840년부터 그는 자연 현상에 관해 과학적이며 체계적인 실험에 몰두했다. 이러한 연구의 기본적 동기는 모든 종류의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들라크루아의 열망과, 주제와 부차적 요소 사이의 균형에 대한 광신적 추구라고 하겠다.
그랑팔레에서는 1854년 디에프 항구에서 제작된 일련의 바다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그 중 <높이 올라서서 바라본 디에프 바다>(1852)의 경우 그 제목이 사후 경매 때 붙여진 것인데, 왼쪽 끝에 놓인 돛단배의 위치 때문에 제목과는 달리 그가 절벽 위에 서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64년 경매에서 이 그림이 높은 가격으로 낙찰되자 그 방에 모였던 사람들이 너나없이 박수를 쳤다고 한다.
그는 이후 계속 쉬지 않고 색채 분할 실험을 계속해 나갔으며, 이 같은 작품들은 그의 자연과의 교감을 잘 나타내 주며 풍경화가로서의 재능을 부각시켰다. 이 같은 특징은 이미 초기에서부터 나타나는데, 투르 미술관에서는 <투르 지방에서의 들라크루아>라는 제목으로 초기 르와르강 근처에서 제작한 데생 및 수채화 4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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